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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희망인 세상

경향 이대근 칼럼 [어떤 백년대계]

 

시민들이 노무현 정부의 수도 이전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할 것들은 너무 많았고, 전문가의 견해는 엇갈렸으며, 정당의 입장은 대립했다. 노무현 정부는 시민 설득에 성공적이지 못했다. 시민과 정치권 모두 이 거대하고 까다로운 주제 앞에 주눅 들고, 중압감에 시달렸다. 그런데 마침 위헌 판결이 모두를 해방시켜 주었다. 여야도 비교적 덜 부담스러운 세종시 계획에 쉽게 합의할 수 있었다. 물론 행정 분할의 효율성 논란은 잠재우지 못했다.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수도 이전보다 수도 분할이 더 나쁘다는 반론이 나돌고 있다. 충남이 균형발전의 적지인가라는 문제도 있었다. 깔끔한 사회적 합의였다고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행정부처 이전 비용이 균형발전 이익보다 크다는 증거는 없다. 행정 효율성이 세종시 계획을 파기해도 좋을 이유가 되지는 않는 것이다. 게다가 세종시는 수많은 논쟁과 토론, 두 번의 대선 공약에 의한 검증이란 긴 터널을 통과했다. 세종시는 이제 여야 합의, 입법, 신뢰의 껍질로 켜켜이 쌓인 단단한 열매와 같다. 효율성 문제 하나만 벗겨내면 먹을 수 있는 과일이 아니다. 이 사업을 취소할 명분을 찾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행복도시 거짓말’에 사죄를

그래도 파기하고 싶다면, “제가 대통령이 되면 행복도시가 안 될 거라고 하지만, 저는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사람입니다”라고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해 사죄하고 용서부터 빌어야 한다. 12번 거짓말했다니 12배의 사죄나, 일년 열두 달 반성하지는 않더라도 12주 정도는 “할 말이 없습니다” 하는 절절한 사죄의 마음을 보여야 하고, 사죄를 받아들일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세종시 합의 과정보다 더 엄격하고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 난제를 하나 하나 거꾸로 푸는 일은 폭발물 해체와 같이 위험한 작업이므로 단단히 준비해야 한다. 물론 박근혜·야당과는 미리 상의해야 한다. 이들의 동의가 없으면 되돌릴 수 없다. 갈등을 관리할 능력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명박이 그동안 보여준 바에 따르면 그런 정도의 섬세함은 전혀 없다. 그의 거친 솜씨로 미루어 민감성 높고 복잡한 이 문제를 제대로 풀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가지 않는다. 도대체 지금까지 제대로 순서를 밟는 것이 하나도 없다. 사죄는커녕 양심의 문제니 백년대계니 하는 적반하장의 훈계로 시작하고는 사전협의는 고사하고 박근혜·야당과 싸우고,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몇 주 내에 논란의 종지부를 찍겠다며 오히려 큰소리였다. 뒤집기가 정말 더 효율적인지 주장하기 전에 효율적인 뒤집기라도 하면 다행이겠다.

박근혜는 반대하고, 여론은 믿을 수 없고, 지지율은 떨어지고, 당은 지방선거에 불안해하고, 총대 멘 총리는 의외로 인기 없고, 시간은 촉박하다. 평지풍파를 각오하고 뒤집기를 해도 성공 가능성이 낮고 성공해도 너무 많은 출혈로 성공의 이익이 없다. 그럴 때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지 않아야 하지만, 이명박은 기어코 열 것이다. 온갖 무리수에 총력전을 펴다 보면 운좋게 성공할 수도 있다. 그래서 재벌과 대학이 줄줄이 내려간다 하고, 의원들이 뭉치고 여론이 돌아서고 국정 지지도가 올라가고 박근혜는 고립되었다고 치자. 난장판 국회를 만들어 수정안 날치기 통과하는 데까지도 성공했다고 치자. 박근혜와의 갈등은 어떻게 해소하고 지방선거는 어떻게 치를 것이며, 야당과는 계속 전쟁만 할 건가. 지난 5년간 해놓은 것을 2개월 만에 뒤집을 수 있음을 보여주면, 남은 자기 임기 3년의 업적을 며칠이면 되돌려 놓을 수 있을지 생각은 하고 있는가.

마음 졸이게 하는 막장 드라마

이 난리법석이 이명박에게 무엇을 안겨주는가. 역사의 새로운 지평? 국운 상승? 위업 달성? 이명박 기준으로는 겨우 제자리를 찾는 것이고, 다른 기준으로는 세종시 없애는 것이다. 하나 추가하자면 과거 정부 정책 하나 더 뒤집는 기록을 세우는 거다. 그러나 그것도 따지고보면 자기 자신을 뒤집는 것이다. 이미 자기 말을 스스로 부정했고, 몇달 참아서 꾸며낸 중도실용의 가면은 벗겨지고, 소통은 도로 일방통행이 되었다. 요즘은 백년대계 이렇게 세우나. 평생을 우지끈 뚝딱 부수고 깨지면서 일해온 이명박이야 근육에 힘이 솟겠지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막장 드라마를 지켜봐야 하는 심장 약한 시민들의 어지러운 심사는 누가 달래줄 건가.

혹시 이 말 들어봤나. “어떻게 이명박이 변하니.”

<2009년 11월 12일 목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