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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희망인 세상

庚寅년 첫 사설(경향, 한겨레)

 





[경향 사설]민주주의 위한 대전환의 해로


소통의 공간은 무한정 펼쳐져 있지만 흐름은 멈춰 있다. 수없이 많은 언어가 쉴 새 없이 교환되지만, 통하지는 않는다. 소통하지 못하는 한국 사회의 풍경이다.

이런 모습이 어제 오늘 목격된 것은 아니지만, 이명박 대통령 집권 첫해 미국산 쇠고기 전면 개방과 촛불시위는 소통 부재로 정부와 시민의 직접 대결을 초래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촛불시위는 끝났으나 ‘소통 없는 사회 현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지난 1년 내내 한국인의 가슴을 짓눌렀던 용산참사가 그 상징적 단면이다. 거리에서 외치는 시민의 많고 적음, 그들 목소리의 높낮이만이 척도는 아니다. 시민들의 마음이 닫혀 있느냐, 열려 있느냐가 중요하다. 안타깝게도 대다수 시민들은 쉽게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다.

정부와 시민 간의 불통과 불신은 민주주의 위기를 시사한다. 현대 민주주의는 다수의 의사를 대의하는 정치를 통해 실현된다. 정치지도자가 대변해야 할 시민들의 뜻과 통하지 못한다면 더 이상 본래 의미의 민주주의라고 할 수 없다. 정부가 시민들을 대의하지 못하는 증거는 충분했다. 교육, 노동, 종교, 문화, 학술, 법조, 공무원 사회에 이르기까지 정부를 비판하는 시국선언이 들불처럼 번졌지만 모두 메아리 없는 외침으로 끝났다.

이명박 정부는 늦게나마 ‘친 서민’ ‘중도·실용’으로 시민들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서로 소통하지는 못했다. 시장 만능, 재벌 중심, 경쟁 중시, 효율 우선의 국정을 전환하지 않은 채 이미지 개선 전략으로 도입된 구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한편에서는 정부에 대한 요구와 항변, 다른 한편에서는 시민을 향한 정부의 해명과 설득·호소가 쏟아졌지만 서로 일방통행했을 뿐이다.

정부는 그런 갈등을 수습하고 달랠 의지도 능력도 없는 듯했다. 부자 감세, 미디어법, 4대강 사업, 세종시 수정, 방송 장악, 인권 경시, 노조 탄압, 무한경쟁 교육, 남북관계 경색, 시민단체 줄세우기 등 그들만의 국정 의제를 하나하나 밀어붙였다. 시민의 동의를 구하거나 여론을 수렴하려는 진지한 노력도 없었다. 한 번의 선거로 위임된 권력은 무소불위였다.

민주주의는 비판의 자유를 무제한 허용하는 제도이다. 상호 견제와 감시가 씨줄과 날줄로 얽혀 작동하면서 끊임없이 개선하고 대안을 만들어가는 체제다. 그러나 이 정부 들어 민주주의는 심각한 도전에 처해 있다. 비판세력과 시민사회를 옥죄는 권위주의 시대의 악습이 되살아난 것이다.


서민의 삶에 희망 갖게 해야

표적수사·표적감사·민간사찰이란 말이 곳곳에서 회자되고, 검찰·국정원·국세청·감사원 등 국가기강을 바로잡아야 할 권력기관의 정치적 중립성은 불신을 받았다. 권력의 공영방송 장악, 미디어법 강행으로 언론의 비판 기능은 크게 약화됐다. 공공기관·시민단체·문화·교육·학계 등 각 분야에서 정권과 코드가 다르다고 ‘밥줄’을 끊어버리는 행태가 일상화됐다. 심지어 법과 절차를 무시하고 권력 의지를 관철하기도 했다. 민주주의의 기본인 절차적 정당성조차 훼손될 지경이었다.

우리는 지금 지난 2년의 이 같은 문제점들을 고스란히 안은 채 새해를 맞이하고 있다. 지난 2년의 경험에서 교훈을 얻거나 실책을 극복할 대안도 찾지 못했다. 이명박 정부의 새로운 마음 가짐은 보이지 않고, 여야 정당들도 시민사회도 이 나라를 어떻게 바로잡을지 전망할 수 없는 상태에서 무작정 또 한 해를 대면하고 있다.

2010년은 단순히 2009년의 연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 대전환이든, 단절이든, 창조적 파괴든 새로운 질서를 세워야 한다. 역사는 우리에게 새해의 의미를 각별하게 새겨주고 있다. 2010년은 일제의 강제합병 100년, 한국전쟁 60년, 4·19 혁명 50년, 광주민주화운동 30주년이 되는 해다. 실로 한국 근·현대사의 파란만장한 역정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한다. 민주주의를 향한 여정이 얼마나 험난하고 고통스러운 것이었는지, 왜 한국은 여전히 민주주의 위기를 논하는 처지에 있는지 현실을 찬찬히 조망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60년이 지났는데도 이 사회는 아직도 분단과 전쟁이 낳은 반공체제, 냉전시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보수 편향 사회, 국가보안법의 존재, 시대착오적 색깔론의 횡행이 그 상징이다. 남북은 여전히 화해와 협력의 새로운 전망을 열지 못하고 있다. 4·19 혁명, 광주항쟁은 이제 기념일로 남아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야 할 역사가 되었지만, 민주주의 과제는 여전히 미완이다. 피 흘려 찾고자 했던 민주주의는 그 외양을 겨우 갖추었을 뿐, 다수 서민을 위한 제도라는 본질에는 가까이 다가서지 못했다.

서민들의 삶을 위기로 몰아가고 사회적 양극화의 수렁에 빠뜨린 신자유주의, 비판과 표현의 자유를 억누르고 정치의 존재 이유를 경시하는 권위주의적 통치로 인해 민주주의의 참모습은 찾기 어렵게 되었다. 21세기의 새로운 10년을 맞지만 역사의 행진은 멈추어 선 것 아닌가라는 의구심마저 든다. 이처럼 방황하는 민주주의의 행로를 바로잡을 기회를 새해에 또 놓친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될 것이다.


민주주의 위기 부른 권위주의적 통치

그런 의미에서 6월의 지방선거는 중요하다. 민주주의 진전을 위한 시험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 정치 구도로는 계층·지역 불균형과 무한경쟁으로 인한 삶의 질 악화, 민주주의 후퇴로 인한 공동체의 위기를 시정하기 어렵다. 새해에는 어떻게든 그런 기성 정치 패러다임의 변화를 압박할 기회를 잡아야 한다.

우선 이명박 정부가 변해야 한다. 국가경영은 효율성만 내세우는 기업경영과 다르다. 앞뒤 좌우로 소통하며 갈등을 조정하고 자원을 균형있게 배분하는 정치력을 발휘해야 한다. 과정과 절차를 무시하고 독선적인 국정 운영을 지속하다가는 신뢰와 통합, 민주적 질서와 원칙의 훼손은 물론 정권에 대한 불신과 저항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안팎의 엄중한 경제 현실도 직시해야 한다. 새해 세계경제는 여전히 불확실한 환경에 둘러싸여 있다. 금융위기는 벗어났다고 하나 많은 위험 요인이 잠복해있다. 한국 경제는 외환위기 이후 누적된 구조적 문제들을 그대로 안은 채 이 같은 불확실성에 노출돼 있는 상황이다. 고용 없는 성장, 소득격차 심화, 고용의 질 악화 등 구조적 불안 요인들이 개선될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다행히 경기 회복세가 이어진다 해도 특단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한 경제구조가 나아지기 어렵다.

서민들의 좌절과 절망감은 깊어가고 있다. 임기응변이 아닌 근본적인 체질 개선 노력을 통해 미래의 삶에 희망을 갖게 해야 한다. 4대강 사업이 상징하는 ‘구시대 전략’으로는 한국 경제가 비전을 가질 수 없다.

역사에 남을 차별화된 ‘성공 신화’에 집착한 나머지 갈등해소와 사회통합이라는 시대적 과제 해결에 실패한 역대 정권의 집권 3년차 경험을 돌아볼 필요도 있다. 1987년 대선으로 집권한 노태우 정권은 3당합당으로 정치·사회적 갈등을 격발시켰다. 김영삼 정권은 ‘세계화 원년’을 선언해 개방 조치를 서둘렀으나 결국 외환위기를 맞았다. 김대중 정부 집권 3년차에는 권력형 비리가 터지면서 권력 누수가 시작됐고, 노무현 정권은 연정 등 정치적 현상 타개에 골몰하다 불신과 갈등을 자초했다.

야당 및 진보세력의 각성도 필요하다. 현 정부의 실정에도 불구하고 대안으로 인식되지 못한 것은 그들의 책임이다. 과거 집권 당시 민생 해결 역량의 부족이 어떤 결과를 자초했는지 뼈저린 반성을 토대로 실효성 있는 정책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그래야 국민적 신뢰를 얻고 민주주의 후퇴와 독선적 국정운영에도 제동을 걸 수 있다.

올해는 이명박 정부의 후반기 국정을 가늠하는 중요한 해다. 특히 지방선거 등 일련의 정치 일정은 시민의 삶과 민주주의의 향방에 적잖은 영향을 줄 것이다. 갈수록 팍팍해지는 서민경제의 안정 또한 절체절명의 과제다.

그런 만큼 모두 새해를 맞는 자세가 남달랐으면 한다. 과거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도록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런 다짐도 없이 2010년을 맞는다면 어떻게 다시 희망과 꿈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가.

 








[한겨레 사설]사람 사는 세상, 역사 앞에서 다시 그 길을 묻다





새해 첫날, 모든 ‘나’의 표고는 높다. 까치발을 하지 않아도 비상하는 새의 눈높이보다 높다. 지나온 시간을 반추하고 다가올 시간의 끝을 가늠하며 희망과 포부를 다지는 까닭이다. 경인년 새해 첫날, 우리가 딛고 있는 표고는 더욱 높다. 다시 역사의 분수령으로 떠밀려온 까닭이다. 산과 물이 나뉘듯이, 민권의 전진과 퇴행을 가르는 분수령이다.


우리의 시선이 나아갈 시간보다 지나온 시간을 먼저 응시하는 건 신중함 때문이 아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지난해 막다른 호소처럼, 담벼락에 대고 욕이라도 해야 할 만큼 상황은 위중하고 절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위기의 내용은 역사의 고비마다 외양만 달리한 채 되풀이 출현했던 것들이니 새로울 게 없다. 따라서 역사적 성찰 속에서 그 극복의 열쇠를 찾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일제강점 100년 등 과거 성찰할 때


흔히 지난 20세기를 폭력과 야만의 시대로 규정한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지구적 차원의 파괴와 대량학살의 시대를 열었고, 계속된 냉전과 패권전쟁 그리고 국지전은 역시 학살과 인종청소를 지구촌 구석구석으로 확산시켰다. 그 야만과 폭력의 극적인 무대는 바로 한반도였다. 식민체제의 수탈과 억압(국치 100돌), 6·25전쟁과 학살(60돌), 독재와 인권유린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폭력이 자행됐다.


병탄은 단지 수탈과 억압에 그치는 게 아니었다. 해방 후 반도의 분단과 사회 분열 그리고 억압체제의 근본 원인이 되었다. 외세에 의존한 불완전한 해방은 분단으로 이어졌고, 친일과 항일의 대결은 이념대결의 외피를 두른 채 해방공간에서 대규모 학살과 동족상잔으로 이어졌다. 이후 친일세력은 분단체제의 고착화를 통해 기득권의 유지 확대를 추구했으며, 거듭된 독재체제의 탄생은 그 결과였다. 분단과 독재는 병영사회를 강요하고, 민주주의와 인권을 유린했다.



물론 야만의 역사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저항과 승리의 역사 또한 우뚝했다. 일제하에서 민중의 항쟁이나 해방 후 독재체제에 대한 투쟁은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끈질겼다. 4·19민주혁명(50돌)과 5·18광주항쟁(30돌) 그리고 6·10민주항쟁은 그 금자탑이었다. 민주정부는 그 속에서 탄생했고, 6·15남북공동선언(10돌)을 낳았다.


그러나 지금 구시대의 망령이 모두 부활한다.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던 전직 대통령의 자진과 용산참사는 상징적 희생제의였다. 지구적 금융위기와 함께 종언을 고했지만, 우리 사회에서 신자유주의의 망령은 여전히 맹위를 떨치며 민생을 벼랑 끝으로 내몬다. 사회·경제적 양극화 속에서 갈등과 대립은 계층·지역·세대간으로 확산돼 공동체의 근간을 흔든다. 분단 고착화의 망령도 부활해 다시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고, 개발독재의 망령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훼손하고 있다.

 

올곧은 실천 통해 미래로 ‘전진’


민권은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사람 사는 세상 또한 저절로 이뤄지지 않는다. 김수영 시인이 말했듯이,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 법이고, 민권의 발전엔 어김없이 피와 눈물과 땀이 따른다. 시민의 각성된 의식과 적극적인 참여만이, 민권의 전진과 사람 사는 세상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파편화된 진보·민주세력의 전면적인 반성과 연대 또한 절실하다. 올해 지방자치제 선거는 그 시험대가 될 것이다.


역사는 도도하게 흐르지만 그 속의 사람들이 어떤 생각과 몸짓을 하느냐에 따라 방향과 질을 달리하기에 우리의 마음은 가볍지 않다. 너와 나의 올곧은 실천이 모여 우리 모두의 삶의 영역을 확장하고, 공동체를 풍요롭게 하며, 민족사를 진전시킬 것이다. <한겨레>는 오로지 진실보도로 망령의 허상을 드러내어 민권의 발전에 이바지할 것임을 다짐한다.